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구정 공세 (문단 편집) == 과정 == 구정([[설날]])은 [[음력]]을 쓰는 나라라면 명절로 다루는 중요한 날이다. [[베트남]]도 한국처럼 중국의 영향으로 설날을 쇠었기 때문에 이때는 남·북 베트남 모두 [[크리스마스 휴전|휴전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었다.]][* 영화 풀 메탈 자켓에서 주인공의 상관이 "구정에 베트콩측의 공세가 있을 거라는 소문이 있다."는 주인공의 얘기를 듣자 "구정은 [[독립기념일|7월 4일]]과 같은 날이야 북남 할거없이 그날에는 폭죽이나 터뜨린다고"라고 하며 이를 귀담아 듣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즉 미국이 참전한 1964년부터 1967년까지는 정말 그랬기에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기습공격을 감행할 것이라 예상치 못했고 그런 소문도 일종의 소문으로만 받아들였다.] 이 기간에는 [[미군]]도 예외 없이 연휴를 즐기기 위해 한껏 풀어져 있었고 게다가 설날에는 인파와 차량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기 때문에 검문도 어려웠다. [[베트콩]]은 이를 알고 기습을 계획한다. [[남베트남]]의 주요 도시와 시설을 모두 공격하는 이 작전에 '''35개 대대'''에 달하는 병력이 투입되었다. 이 병력들은 변장을 하고 있었으며 무기는 관 속에 넣어서 들어오는 등 철저하고 치밀하게 계획되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뗏 휴전 시에도 [[베트남 공화국군]]만 공격받지 않았을 뿐 외국군([[대한민국 국군|한국군]], [[미군]], [[호주군]] 등)은 어김없이 공격받았다. 실제 베트남 민주 공화국군은 휴전 기간에는 미군 비행기가 잘 뜨지 않는다는 걸 노려서[* 알다시피 미 공군은 북베트남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기간 호치민 루트를 집중 가동했고[* 휴전기간 중 수송하는 무기와 탄약이 6개월 분을 넘었다.] 주의 분산을 위해 로켓포 공격 따위로 딴지를 걸었다. 이런 사실은 당시의 [[미합중국 육군 특수작전부대|그린베레]] 정찰 보고서 등에도 자주 경고되었으나 MACV(베트남 군사원조사령부)는 이를 무시하여 피해를 키우고 말았다. 물론 미군이라고 아예 손놓고 있지는 않았다. 1968년 테트 공세를 준비하기 위한 사전 공세는 1967년 말부터 캄보디아 국경 인근 서부지대와 북부 비무장지대 인근에서 있었다. 상당한 규모의 북베트남군 공세로 인해 미군 전투 대대들이 다수 이 지역으로 파견된 상태였다. 구정 공세를 앞둔 시기 주월미군 사령부 내부에서도 너무 많은 부대들이 외곽에 나가 있어 테트 연휴를 앞두고 대도시들의 치안부재가 걱정된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고, 미군들도 전방에서 대대들을 빼서 재배치시켰다. 그나마 미군보다 휴전에 대해 의구심이 강했던 한국군 지휘부 정도가 훨씬 더 철저한 방어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이 관리하고 소수의 미 군사고문단(미 해병대)이 주둔했던 [[후에]]시[*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도시이다. 가장 최근의 베트남 왕조이지만 규모나 경제력도 그렇고 수도였던 기간도 1804년부터 1955년까지 150년 정도였기 때문에 [[하노이]]보다 비중이 떨어지는 곳이다. 후에를 수도로 삼은 [[응우옌 왕조]]가 본래 [[다이비엣]]의 반독립적 지방 정권이었기도 했고. 한국으로 치면 남한은 [[수원시]], 북한은 [[개성시]] 정도에 비유할 수 있다.]는 삽시간에 함락되어 민간인 수천명이 학살당하고 지옥의 전장이 되어 버렸다.[* 강 남쪽의 MACV본부와 강 북쪽의 남베트남 1사단 본부만 적군에 넘어가지 않고 버텼다.] 결국 충분치는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때 재배치한 대대들이 테트 공세 초기에 베트콩-북베트남군의 공세를 막아낸 주력부대가 되었다. [youtube(q1vJqTN-qVI)] 당시의 미국 CBS 뉴스. [[사이공]]을 둘러싼 험악한 공기가 여실히 드러난다.[* 잔인한 장면이 있으므로 재생시 주의. 총맞고 쓰러진 사람을 발로 차서 밀어내는 장면도 나온다. 도중 한국군 [[군사경찰|헌병]]도 잠시 볼 수 있다.] '''1월 30일, 새벽의 폭죽놀이를 신호로 베트콩들은 공세를 시작했다.''' 사이공에 위치한 주요 기관 시설들은 모두 타겟이 되었고, 주월 미 대사관마저 베트콩들이 RPG로 외벽을 부순 뒤 침입하여 깽판을 부렸다. 결국 전원 사살 당하긴 했지만 대사관 직원이 [[베레타 M12]] [[기관단총]]을 들고 아직 남아있는 베트콩을 찾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은 미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사실 이 사람은 대사관 직원이 아니라 [[미국 중앙 정보국|CIA]] 요원이다. 전시, 분쟁지역에서 활동하는 CIA는 보통 현지 미 대사관에 본부를 차리는 경우가 많은데, 왜냐하면 미국측 치외법권이기도 하고 현지에서 제일 보안이 확실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이공뿐만 아니라 남베트남 대부분의 도시(총 41개 지역)에 잠입해 있었기 때문에 남베트남 전역이 전쟁터가 되었다. 또한 미군과 한국군을 제외한 동맹군은 이때 기습을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데다 당시 남베트남군 대부분이 설을 쇠러 가서 공백이 생겼기 때문에 크게 당황했고, 전투는 매우 혼란스럽게 벌어졌다. 그러나 약속된 북베트남군의 지원이 없었고 베트콩들은 자신들이 도시에서 전투를 벌이면 남베트남 도시 내부에서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미군은 [[프랑스군]]과 달리 화력지원과 보급도 매우 잘 받는 상태였다. 베트콩의 공세는 2~3일만에 대부분 미군에게 진압되었다. 하지만 수도 사이공은 2주, 후에에서는 한달 가까이 베트콩의 게릴라전에 의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특히 후에에서는 19세기 응우옌 왕조가 건설한 보방식 요새가 베트콩에게 탈취당하면서 전투가 치열해졌고 이 기간 동안 정부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특히 후에 시내는 상황이 매우 안 좋아서, 원래 외국군대는 간섭군이란 지적을 피하기 위해 도시 방어는 남베트남군이 맡도록 되어 있던 원칙까지 어겨가면서 미 해병대도 투입되어 섬멸전을 벌여야 했다. 후에 전투에서 베트콩이 점령하고 있던 시가지를 탈환하려는 미군 병사들은 시가지 전투 훈련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미군에서는 궁여지책으로 병사들이 60년대에 대한민국에서도 유명했던 미국 abc 방송의 전쟁 드라마 [[Combat!]] (컴뱃!)을 시청하게 했다. 이 드라마는 연출자와 연기자들의 상당 수가 [[제2차 세계 대전]]과[[ 6.25 전쟁]]의 참전용사들이어서 실제 전투의 고증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고 한다. 병사들은 이 드라마에서 시가지 전투 상황에서 각 건물을 공격하고 건물 내 격실들을 제압하는 장면들을 보고 실전에 적용했으며 큰 효과를 보았다. 이때 포로들과 민간인을 포함한 수천 명이 처형당하고 강제 [[북송]]당했다. 처형당한 이들은 대부분 군경의 가족이나 정부와 연관된 간부 혹은 그들의 가족들이었다. [[후에 대학살]] 항목 참조. 그동안 한국군은 베트콩의 공격을 사전 예측했기 때문에 돌파당한 진지는 한 군데도 없었고, 오히려 이들의 공격을 철저하게 방어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